표창장/훈장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대한민국 건국포장
영정에 봉헌된 건국훈장
아래의 자료사진 2장은 후산선생이 일본 헌병에 의하여 검거되었을 당시에 작성된 검거보고서 입니다
자료제공: 국가보훈부
[사진설명] 제목:독립자금모집자 검거에 관한 건 문서번호:密제102호基814高警제9432호 작성일:1920.04.02 작성자:육군성 수신자:原敬(내각총리대신)외
보고서의 내용 *수신자 原敬은 '하라 다카시' 조선총독부 제2대 총독(1914~1921)이다.
애국지사 후산(後山)선생 영전에
메모: 아래의 글은 후산선생 타계 후 약 1년간의 업적 탐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드러난 후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타계 1주기를 맞이하여 비석에 새겨 넣은 비문 입니다
여기 조국의 독립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애국지사 後山 徐丙轍 선생께서 향년 89세로 고이 잠드시다
선생은 조선 선조 인조조의 달성 徐省(서성), 아호 藥奉(약봉)의 11대 손으로 서기 1893년 7월 6일 충남 서산군 해미면 억대리에서 탄생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배우시고 사립 해명학교에서 忠과 孝와 義의 도를 닦으시며 신학문에 전념하시다가 약관 21세 되시던 경술년 8월 22일 온 민족이 조국을 잃은 통한의 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버리시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독립투쟁을 시작하셨다.
국내외에서 대소의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동안 선생은 대한독립단원으로 활약하시며 서산군내의 대한독립단 조직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1918년 서산지단을 조직하셨고 1919년에는 3.1독립 운동에 참가하셨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임정을 도와 독립투쟁을 하시던 중 1920년 피검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고, 출옥후 애국투사 金相玉(김상옥), 明濟世(명제세). 曺晩植(조만식). 金東淳(김동순) 선생 등과 조국광복을 위한 일대의거를 추진하시던 중 재차 피검되어 경성형무소에서 또다시 옥고를 치르셨다. 옥중에서도 출옥 후에도 선생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요시찰 인물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진 박해와 검속의 고난을 무한히 겪으시면서도 혼신의 투쟁을 계속 하시다가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선생은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조국애와 민족자립 정신을 사회에 심으셨고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아끼셨으며 근검 절약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시며 애국지사의 모임인 독립동지회에 참여하시어 독립정신의 앙양에 진력하셨다. 이에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의 애국공적을 기리어 1977년 12월 24일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오호! 애국지사 後山선생은 여기 고이 잠드셨으니 전 생애를 겨레에 바치신 그 고고한 정신과 빛나는 공덕은 이 겨레와 함께 영원히 청사에 남을 것이요. 영예롭고 고귀한 교훈은 후손에 길이 전승될 것이다.
이제 그 무한한 사연을 간추려 이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한다. 서기 1978년 2월 24일.
선생은 조선 선조 인조조의 달성 徐省(서성), 아호 藥奉(약봉)의 11대 손으로 서기 1893년 7월 6일 충남 서산군 해미면 억대리에서 탄생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배우시고 사립 해명학교에서 忠과 孝와 義의 도를 닦으시며 신학문에 전념하시다가 약관 21세 되시던 경술년 8월 22일 온 민족이 조국을 잃은 통한의 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버리시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독립투쟁을 시작하셨다.
국내외에서 대소의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동안 선생은 대한독립단원으로 활약하시며 서산군내의 대한독립단 조직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1918년 서산지단을 조직하셨고 1919년에는 3.1독립 운동에 참가하셨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임정을 도와 독립투쟁을 하시던 중 1920년 피검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고, 출옥후 애국투사 金相玉(김상옥), 明濟世(명제세). 曺晩植(조만식). 金東淳(김동순) 선생 등과 조국광복을 위한 일대의거를 추진하시던 중 재차 피검되어 경성형무소에서 또다시 옥고를 치르셨다. 옥중에서도 출옥 후에도 선생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요시찰 인물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진 박해와 검속의 고난을 무한히 겪으시면서도 혼신의 투쟁을 계속 하시다가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선생은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조국애와 민족자립 정신을 사회에 심으셨고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아끼셨으며 근검 절약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시며 애국지사의 모임인 독립동지회에 참여하시어 독립정신의 앙양에 진력하셨다. 이에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의 애국공적을 기리어 1977년 12월 24일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오호! 애국지사 後山선생은 여기 고이 잠드셨으니 전 생애를 겨레에 바치신 그 고고한 정신과 빛나는 공덕은 이 겨레와 함께 영원히 청사에 남을 것이요. 영예롭고 고귀한 교훈은 후손에 길이 전승될 것이다.
이제 그 무한한 사연을 간추려 이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한다. 서기 1978년 2월 24일.
독립동지회 동지 심형택은 글을 짓고, 海淸 손경환은 글씨를 쓰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대한민국 건국포장
영정에 봉헌된 건국훈장
아래의 자료사진 2장은 후산선생이 일본 헌병에 의하여 검거되었을 당시에 작성된 검거보고서 입니다
자료제공: 국가보훈부
[사진설명] 제목:독립자금모집자 검거에 관한 건 문서번호:密제102호基814高警제9432호 작성일:1920.04.02 작성자:육군성 수신자:原敬(내각총리대신)외
보고서의 내용 *수신자 原敬은 '하라 다카시' 조선총독부 제2대 총독(1914~1921)이다.
애국지사 후산(後山)선생 영전에
메모: 아래의 글은 후산선생 타계 후 약 1년간의 업적 탐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드러난 후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타계 1주기를 맞이하여 비석에 새겨 넣은 비문 입니다
여기 조국의 독립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애국지사 後山 徐丙轍 선생께서 향년 89세로 고이 잠드시다
선생은 조선 선조 인조조의 달성 徐省(서성), 아호 藥奉(약봉)의 11대 손으로 서기 1893년 7월 6일 충남 서산군 해미면 억대리에서 탄생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배우시고 사립 해명학교에서 忠과 孝와 義의 도를 닦으시며 신학문에 전념하시다가 약관 21세 되시던 경술년 8월 22일 온 민족이 조국을 잃은 통한의 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버리시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독립투쟁을 시작하셨다.
선생은 조선 선조 인조조의 달성 徐省(서성), 아호 藥奉(약봉)의 11대 손으로 서기 1893년 7월 6일 충남 서산군 해미면 억대리에서 탄생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배우시고 사립 해명학교에서 忠과 孝와 義의 도를 닦으시며 신학문에 전념하시다가 약관 21세 되시던 경술년 8월 22일 온 민족이 조국을 잃은 통한의 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버리시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독립투쟁을 시작하셨다.
국내외에서 대소의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동안 선생은 대한독립단원으로 활약하시며 서산군내의 대한독립단 조직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1918년 서산지단을 조직하셨고 1919년에는 3.1독립 운동에 참가하셨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임정을 도와 독립투쟁을 하시던 중 1920년 피검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고, 출옥후 애국투사 金相玉(김상옥), 明濟世(명제세). 曺晩植(조만식). 金東淳(김동순) 선생등과 조국광복을 위한 일대의거를 추진하시던 중 재차 피검되어 경성형무소에서 또다시 옥고를 치르셨다. 옥중에서도 출옥 후에도 선생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요시찰 인물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진 박해와 검속의 고난을 무한히 겪으시면서도 혼신의 투쟁을 계속 하시다가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선생은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조국애와 민족자립 정신을 사회에 심으셨고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아끼셨으며 근검 절약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시며 애국지사의 모임인 독립동지회에 참여하시어 독립정신의 앙양에 진력하셨다. 이에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의 애국공적을 기리어 1977년 12월 24일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오호! 애국지사 後山선생은 여기 고이 잠드셨으니 전 생애를 겨레에 바치신 그 고고한 정신과 빛나는 공덕은 이 겨레와 함께 영원히 청사에 남을 것이요. 영예롭고 고귀한 교훈은 후손에 길이 전승될 것이다.
이제 그 무한한 사연을 간추려 이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한다. 서기 1978년 2월 24일.
독립동지회 동지 심형택은 글을 짓고, 海淸 손경환은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