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시청기념비
전체 높이→2m75cm. 이 중 비신 높이→1m45cm. 가로→52cm. 폭→21cm. 가첨석 높이→45cm. 가로→73cm. 폭→44cm. 그리고 대석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하대석 높이→35cm. 가로→1m58cm. 세로→1m29cm. 중대석 높이→42cm. 가로→99cm. 세로→67cm. 상대석 높이→8cm. 가로→81cm. 세로→49cm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 비신만 오석이고 그 외는 모두 화강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기념비 전면 중앙에는 한자로 크게 「志士後山徐丙轍紀念碑」(지사후산서병철기념비)라 새겨있고, 또 그 좌우에는 한자로 각각 2열 4행이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의 내용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해외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모금 활동에 적극적인 협조를 함으로서 일경에 붙들려 심한 고문을 당할 때에는, 일부러 혀를 깨물어 벙어리 행세를 하여 문초에 항거하였고, 또한 국내의 투쟁시에는 온갖 위험한 일과 난관에 부딪쳐도 근검절약의 경제적인 모범을 보여 시종일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조국이 광복된 뒤에는 세상 사람(世人)들이 지나치게 공로를 자랑하였으나, 유독 후산 선생은 겸손한 태도로 사양하는 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간직하였다.
후산이 돌아가신 뒤에 정부에서 포상이 내려졌으나,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서 장학회를 설립하여 영재(英才)를 기르니 그 뜻이 영원히 빛날 것이다.
글의 내용은 시청 및 서산문화원의 감독하에 검수되고 만들어졌다.
글의 시작은 좌측면 -> 뒷면 -> 우측면 순서대로 읽어내려간다.
사진 상의 글씨가 작아서 비문탁본을 입수하여 따로 게재할 예정이다.
기념비제막식 -1979 기미년 3월 1일 정오-
3.1절 60주년인 이날 열린 제막식에는 참석자 모두에게 나누어진 삼일절 노래 악보를 들고 서령고등학교 관악대의 연주로 삼일절 노래를 제창하였다.서산 시청 기념비
전체 높이→2m75cm. 이 중 비신 높이→1m45cm. 가로→52cm. 폭→21cm. 가첨석 높이→45cm. 가로→73cm. 폭→44cm. 그리고 대석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하대석 높이→35cm. 가로→1m58cm. 세로→1m29cm. 중대석 높이→42cm. 가로→99cm. 세로→67cm. 상대석 높이→8cm. 가로→81cm. 세로→49cm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 비신만 오석이고 그 외는 모두 화강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기념비 전면 중앙에는 한자로 크게 「志士後山徐丙轍紀念碑」(지사후산서병철기념비)라 새겨있고, 또 그 좌우에는 한자로 각각 2열 4행이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의 내용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해외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모금 활동에 적극적인 협조를 함으로서 일경에 붙들려 심한 고문을 당할 때에는, 일부러 혀를 깨물어 벙어리 행세를 하여 문초에 항거하였고, 또한 국내의 투쟁시에는 온갖 위험한 일과 난관에 부딪쳐도 근검절약의 경제적인 모범을 보여 시종일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조국이 광복된 뒤에는 세상 사람(世人)들이 지나치게 공로를 자랑하였으나, 유독 후산 선생은 겸손한 태도로 사양하는 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간직하였다.
후산이 돌아가신 뒤에 정부에서 포상이 내려졌으나,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서 장학회를 설립하여 영재(英才)를 기르니 그 뜻이 영원히 빛날 것이다.
뒷면
기념비제막식 -1979 기미년 3월 1일 정오-
여기서 잠깐, 삼일절 노래의 작사가 정인보 선생이 수정을 거듭하며 노랫말을 완성하신 과정이 담긴 원고가 흥미로워서 올립니다
서정익 박사의 유족대표 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