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산선생소개
- 40대의 모습 / At age of 40's -
1893 |
충남 서산 해미면 출생 Born in Haemi, Seosan Coun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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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사립해명학교에서 수학 Studied at private Haemyeong Acade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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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단체 가입 Enrolled in Independence Organiz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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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
대한독립단 서산지단 조직 Organized Seosan Branch of Ind. Cor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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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3.1운동 천안서산지역 주도 Joined 3.1 Movement in Cheonan A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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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일경에 체포, 공주형무소 수감 Arrested and Imprisoned in Gongju J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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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석방 1년만에 경성형무소 재수감 Arrested and Imprisoned in Kyungseong J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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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독립동지회 가입과 활동 Enrolled in Patriots Associ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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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
타계 Deceas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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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건국훈장 건국장추서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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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독립유공자 지정 Designated as a Person of Mer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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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기념사업회 발족 'Husan Honor Committee' Launch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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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후산장학회 설립 'Husan Scholarship Committee' Launch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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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국립대전현충원 이장 Graveyard moved to Daejeon Nat'l Cemetry |
국내외에서 대소의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동안, 공은 대한독립단원(大韓獨立團員)으로 활약하며 서산군내의 독립단 조직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1918년 서산지단을 조직했고, 이어 1919년에는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중국 상해(中國上海)에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자 공은 임시정부를 도와 독립투쟁을 하던 중, 1920년 일경()에 피검(被檢)되어 공주형무소(公州矯導所)에서 옥고(獄苦)를 치렀고, 출옥후 애국투사 김상옥, 명제세. 조만식. 김동순(金相玉, 明濟世. 曺晩植. 金東淳) 등과 조국광복을 위한 일대의거(一大義擧)를 추진 중, 재차 피검되어 경성형무소(경성형무소)에서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에도 공은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조국애와 민족자립 정신 함양에 힘썼고, 또한 근검절약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리고 애국지사의 모임인 독립동지회(独立同志会)에 참여하여 독립정신 양양에 힘써왔다. 그리고 공의 생존시에 그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치하와 그 경위를 물으면 「독립운동은 이해를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치하를 받기 위하여 하는 것도 아니다」 라며 자신은 감추고 공로는 타인에게 돌리는 극히 겸양한 분이었다.
이러한 사연도 당시의 법원 판결문과 생존한 동지들의 구전(口伝)에 읳나 것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이에 정부는 공의 애국공적을 기려 1977년 12월에 건국포장(建囯褒章)을 추서(追敍)하였고 유족에게는 원호금(援護金)을 수여한 바 있다.
- 40대의 모습 / At age of 40's -
1893 | 충남 서산 해미면 출생 Born in Haemi, Seosan County | |
1910 | 사립해명학교에서 수학 Studied at private Haemyeong Academy | |
독립운동단체 가입 Enrolled in Independence Organization | ||
1918 | 대한독립단 서산지단 조직 Organized Seosan Branch of Ind. Corp. | |
1919 | 3.1운동 천안서산지역 주도 Joined 3.1 Movement in Cheonan Area | |
1920 | 일경에 체포, 공주형무소 수감 Arrested and Imprisoned in Gongju Jail | |
1929 | 석방 1년만에 경성형무소 재수감 Arrested and Imprisoned in Kyungseong Jail | |
1945 | 독립동지회 가입과 활동 Enrolled in Patriots Association | |
1977 | 타계 Deceased | |
1990 | 건국훈장 건국장추서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 |
1993 | 독립유공자 지정 Designated as a Person of Merit | |
후산기념사업회 발족 'Husan Honor Committee' Launched | ||
1994 | 후산장학회 설립 'Husan Scholarship Committee' Launched | |
2014 | 국립대전현충원 이장 Graveyard moved to Daejeon Nat'l Cemetry |
국내외에서 대소의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동안, 공은 대한독립단원(大韓獨立團員)으로 활약하며 서산군내의 독립단 조직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1918년 서산지단을 조직했고, 이어 1919년에는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중국 상해(中國上海)에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자 공은 임시정부를 도와 독립투쟁을 하던 중, 1920년 일경()에 피검(被檢)되어 공주형무소(公州矯導所)에서 옥고(獄苦)를 치렀고, 출옥후 애국투사 김상옥, 명제세. 조만식. 김동순(金相玉, 明濟世. 曺晩植. 金東淳) 등과 조국광복을 위한 일대의거(一大義擧)를 추진 중, 재차 피검되어 경성형무소(경성형무소)에서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에도 공은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조국애와 민족자립 정신 함양에 힘썼고, 또한 근검절약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리고 애국지사의 모임인 독립동지회(独立同志会)에 참여하여 독립정신 양양에 힘써왔다. 그리고 공의 생존시에 그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치하와 그 경위를 물으면 「독립운동은 이해를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치하를 받기 위하여 하는 것도 아니다」 라며 자신은 감추고 공로는 타인에게 돌리는 극히 겸양한 분이었다.
이러한 사연도 당시의 법원 판결문과 생존한 동지들의 구전(口伝)에 읳나 것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이에 정부는 공의 애국공적을 기려 1977년 12월에 건국포장(建囯褒章)을 추서(追敍)하였고 유족에게는 원호금(援護金)을 수여한 바 있다.